비가 내리는 우울한 아침이었다.
젖어요, 하며 건낸건 우산도 우비도 아닌 머리를 겨우 하나 가릴 크기의 박스.
누구길래 오지랖이 이렇게 넓은가 하며 뒤를 돌자 저의 시선보다 좀 더 아래에 자리한 사내의 동그란 정수리가 보인다.
젖어요.
다시 한 번 들이밀어지는 박스와 그 박스를 쥔 반지 가득한 손. 뼈마디가 불거진, 얇다란.
손등을 타고 올라가 이내 마주한 따뜻한 눈동자에, 의심이 많은 성격에도 그만.
처음 본 사람의 호의를 받고 말았다.
젖어요. 마음이.
빗물이 스며든 박스는 눅눅하고 기분 나쁜 촉감이다. 나가려다 말고 눈에 걸리적 거려 집어들자 마자 후회할 정도로.
가는 길에 버려야지, 하고 손가락 끝만 이용해 잡다 문득 사내를 떠올린다.
고개를 탈탈. 분리수거도 안할거야.
"뭐냐 그건?"
"신경 꺼."
"요즘 폐지 주워? 많이 어렵냐?"
"너 하던거나 마저 하라고."
문득 비치는 거울로 새빨개진 저의 귀를 놓칠리가 없는 친구다.
"우리 집에 남는 신문 많은데 오늘 가져가..니가 그렇게 힘든 줄도 모르고..."
"성규형 차 긁은거 이성열 저새끼래요."
"야!!!!!!!"
이호원 저 배신자 새끼!
등뒤로 쏟아지는 성열의 욕에 흐렸던 기분이 조금 맑아진다.
눈물 뿐이던 내게 그대는 미소로 다가와.. 노래를 흥얼 거리며 볕이 잘 드는 곳에 박스를 올려 놓고 나서야 만신창이가 된 저의 친구가 눈에 들어왔다.
"미안하다, 저거 누가 못버리게 감시 잘하고. 저거 버려지는 순간 너 딱지 떼..."
"수업 시간 되지 않았냐? 좀 가라. 잘 지킬 테니까.."
성규의 눈치를 보며 저를 밀어내는 성열에 밀쳐지는척 과방을 나오면서도 계속 눈길이 간다.
근데 저걸 어떻게 돌려주지. 어제 거기로 가면 되나.
돌려주면 뭐라고 할까. 미친놈이라고 할 수도 있어.
⋯그래도 별 수 없지만.
.
.
.
.
.
.
형님 오셨다.
자신도 모르게 빨리 오느라 가쁜 숨을 숨기며 내뱉자 잔뜩 의심이 서린 커다란 눈동자 공격.
"야 내가 생각해봤는데."
"니가 언제부터 생각이란걸 했다고.. 살던 대로 살아."
"이상하단 말이지. 천하의 이호원이 폐지를 줍..."
아파, 새끼야!
"아프라고 쳤으니까."
"아씨.. 그럼 뭔데 이 박스?"
"돌려줘야 돼, 내놔 찢어져."
흡사 상한 생선을 보는 엄마처럼 저를 보는 성열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 조심스레 접힌 박스를 집어든다.
너도 내가 이상하겠지만 나는 내가 정말 이상해.
하지만 생각할 시간이 얼마 없었다. 어제 마주쳤던 시간이 다가와, 조금 빠르던 걸음은 어느새 달리기가 되어버리고 중간즈음 가서는 쨍하던 하늘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어둑어둑.
뭐야 이건.
차가운 느낌에 하늘을 보니 또 비다. 이러다 또 젖어버리겠어.
탁탁탁탁 가볍던 발소리에 물소리가 섞이기 시작하고 더는 못뛰겠다 싶을 때가 돼서야 어제 그 장소에 도착한다.
뭐야. 없잖아.
어쩌면 없는게 당연한데도 어쩐지 기운이 빠져 건물 처마 밑에 서서 괜힌 바닥만 차대기.
이까짓 종이 쪼가리가 뭐라고. 후드 안에서 여전히 보송보송하다 못해 따뜻해지기 까지한 박스를 꺼내 던지려다 결국 다시 집어 넣는다.
무단투기는 안돼.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웃겼지만.
젖었잖아요.
"⋯어..?"
"우산 원래 안 가지고 다녀요?"
"아..."
원래 이런 바보 같은 성격이 아닌데 이상하게 아무 말도 나오지가 않는다.
"비 되게 더러운데, 막 맞으면 안돼요."
"이거, 돌려주려고."
다시 주섬주섬 옷 속에서 조금 구겨져버린 박스를 꺼내자 놀라 동그래지는 눈.
"이거 주려고...?"
"네, 이거 주려고. 저는 빚지는거 별로 안좋아해서."
그리고 사내는 이내 눈을 흐드러지게 휘어가며 아하하, 경쾌하게 웃는다.
"그쪽 되게 이상한거 알아요?"
그렇게 한참을 숨넘어갈 듯 웃고 나서야 겨우 한다는 말이라는게 저런데도 문득 궁금해진다.
"나한테 이 박스 왜 줬어요?"
"그쪽이 우산이 없어서요!"
"그냥 지나가도 되잖아요."
그럼 내가 이상해 질일도 없었을텐데. 그런 말은 속으로만 했다.
"아, 저도 우산이 없었거든요. 근데 마침 그게 눈에 띄는거에요. 그래서 머리만 안 젖으면 되니까 써야겠다, 했는데."
"했는데?"
"여기 서있더라구요."
"네?"
"옷 되게 비싸보이는데, 젖을까봐."
"이거 나이키 세일할 때 오만원 주고 산건데."
"는 뻥이고.."
그냥, 젖을 것 같아서. 젖으면 되게 싫잖아요. 찝찝하고.
"근데 그걸 날 주면...그럼 어제 비맞고 갔어요?"
"난 건강해서 감기 안걸려요."
"감기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쓰고가면 될걸 왜 날 줬냐는 거에요.
"그럼 그쪽은 왜 그거 안썼어요, 지금 비오는데."
"그거야..."
젖을까봐.
"나도요."
젖을까봐.
"저 강아지 키우거든요. 목욕 시키면 털이 다 가라 앉아서 못난이돼요."
"예??"
아무튼, 이거 말려서 돌려준단 거죠?
하고선 제 손에 든 박스를 냉큼 가로채 빗물에 풍덩.
저게 뭐하는 짓이야.
"다시 젖었다."
"뭐하는..."
"이거 또 말려서 줄거에요?"
"네?"
"내일은 나 여기 안 오는데, 레슨 없어서."
"아니 그럼 언제 오는데...요?"
자신도 모르게 높아진 말투를 꾹 누르며 묻자 손을 내민다.
잡으라는건가, 하며 자신도 모르게 맞잡자 다시 숨넘어가게 웃는 사내.
"폰, 흐흐....폰 달라구...."
뒤적뒤적 주머니를 뒤져 폰을 건내는 손도 귀도 빨개졌을게 분명하다.
"이거 내 번호고, 다음 레슨은 이주 이따가인데.. 그 전에 말려 놓을거죠?"
"⋯이거 하루면 마르는데."
"마르면 전화해요. 받으러 갈게."
이름은 동우라고 저장하면 돼요, 장동우.
동우. 사내처럼 온통 동그란 이름이다.
이름에 비가 들어가서 그런가. 햇살 같은데 비랑 잘 어울리네.
"나는 뭐라고 저장해요?"
"아..이호원, 이에요."
우와. 이름 되게 멋있네.
하고 사내는 안녕하듯 손을 흔들고 그대로 빗속으로 달려나간다.
저러면 온통 젖어버릴텐데.
통통 거리며 멀어지는 뒷모습에 어제처럼 쏟아지는 비가 아니었는데도 호원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적셔진 기분이었다.
아⋯. 신발끈 묶어야지.
서둘러 단단히 매듭을 짓고 호원도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박스 이제 필요없어.
핸드폰에 저장된 동우라는 이름을 꾹 누르자 물방울이 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어, 이호원이다! 왜요?"
"받으러 오지 마요, 가져다 주러 갈거니까. 지금."
근데 문제가 있어요.
"뭔데요?"
"이대로는 도저히 마를것 같지 않아서."
뭐야..하며 또 웃는 소리. 그리고.
"그럼 젖은 채로 와도 돼요."
..풍덩.
웃음기 서린 목소리가 하나의 호수가 된다.
아, 얘 정말 장난 아니다.
미치겠다.
빠지고 말았네.
..............
비가 와서 그만...!
'팬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규동남/남장규] 어쩔 수 없는 마음 (0) | 2016.11.14 |
---|---|
[야동/호장/동바] 놀리고 싶은 마음 (0) | 2016.10.31 |
[열동엘/엘우열] 갖고 싶은 마음 (3) | 2016.10.24 |
[야동/호장] 빙판위 로맨스(조각) (0) | 2016.07.20 |
[야동/호장] 청춘지옥 (0) | 2016.07.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