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픽

[야동/호장] 청춘지옥

신사동꽃다발 2016. 7. 13. 00:55

 


 

[야동] 청춘지옥.txt

 

 
청춘지옥
 
 
 

 


by. 신사동꽃다발

 

 

 

 

이호원은 잘생겼다. 그런 주제에 춤도 잘추고 노래도 잘 부르고 심지어 가끔을 제외하면 웃기기까지 했다. 이건 굳이 자신이 호원의 옆집 형 이었어서가 아니라, 인정하고 싶지 않던 몇가지 사실들을 마지못해 추리고 추린 결과였다.
아, 정말 싫다. 내일은 일주일에 두 번 있는 호원의 과외날인데 호원의 어머니는 다음주가 모의고사라며 오늘도 와달라 청을 넣었고 워낙 거절을 못해 거절불구자라는 별명을 얻은 자신답게 터덜터덜 호원의 집앞에 도착하고 마는 것이다.

있는건 장점뿐인 것 같은 호원이 보기 꺼려진건 얼마전 부터였다. 문제는 호원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었다. 두어달 전 뜨거웠던 여름, 축구를 하고 왔는지 땀에 절어있던 호원은 골을 네 골을 넣었다며 그 호원이라는 친구, 축구 잘하더라고. 뻔뻔한 얼굴로 스스로를 칭찬하며 젖어있는 티셔츠를 스스럼없이 벗었고 고삐리의 몸이라기엔 탄탄한 그 모양새에 갑자기 올라간 심장박동수가 단지 못볼꼴을 봐서가 아니라.. 어쩌면 설레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뒤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었던 그 날을 동우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청춘지옥 01. 아프지 않아도 청춘이다.
 
 
 
 
 
 
 
 

"뭐하냐, 문 앞에서."
 
그래도 처음엔 깍듯이 존댓말도 해줬던거 같은데, 언제부터인지 요자는 싹 떼어버리다 못해 이따금씩 장동우, 야, 너까지 시전중이신 불량한 청소년 답지않게 정말로 뭐하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심장체크, 심장체크. 다행히 아직 눈에 띌정도로 심박수가 증가했다거나 하진 않는다. 여튼 지금 딱히 뭘하고 있진 않았는데 물어는 보니 대답은 해야겠고..
 
 
"너 기다렸는데."
"여기 서서?"
"어어.."
"왜? 그 다리로 잘도 서있네."
 
 
네츄럴본 경상도 남자라지요. 애교가 많은 성격은 확실히 아니어서 왜 들어가서 편히 기다리지 문앞에 서있었느냐를 짧게 줄인다는 것이 저런 말들이다. 호원은 여전히 집에는 들어갈 생각이 없는지 아하하, 예의 그 웃음을 지으며 지난번에 어디까지 했더라. 라고 말하는 주제에 책은 거꾸로 들고 있는 동우의 어깨를 잡아 끌었다.
 
엄마, 장동우 배고파서 미쳤나봐. 샌드위치 좀. 평소같으면 너는 선생님한테 미쳤냐가 무슨 소리냐며 등짝을 후려쳤을 엄마 대신 온천여행을 간다는 쪽지만 식탁에 붙어있다. 그래도 샌드위치 있으니까.
나 씻고 올테니까 이거 먹고 기다려. 저에게 간식을 주고 일보러 간 엄마 마음이 이런건가 하며 호원은 동우의 입에 샌드위치 반쪽을 물려주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먹고 기다리라니까, 동우는 또 기다렸다. 다 먹고 기다려야 하는지 반만 먹고 기다려야 하는지를 말을 안해줘서 반입을 남겨 놓고 기다린다. 왜 다 안 먹었냐고 시비 털면 한입에 털어 넣을 심산으로.
그나저나 오늘은 무슨 핑계를 대고 멀찍이 떨어져서 공부를 시킨담. 저의 귀에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따금 폭발하는 심장소리를 들킬까 얼마전부터는 직접 화이트보드까지 준비해 최소 일미터의 간격을 유지한채 과외를 하고 있었는데 호원이 모르는게 있다며 반강제적으로 저를 옆에 끌어다 앉혀 물어볼 때는 호원의 얼굴이나 어깨, 눈같은데가 아닌 동그란 정수리 따위에만 집중하며 설명을 하는게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뭐한다고 더 말랐냐."
"화이트 보드 어디다 놨어?"
"버렸는데."
"왜!!"
"그거 자리만 차지하고 형 글씨 개떡같아서 거기다 쓰면 더 못 알아 보겠어."
 

뭐해, 안 앉고.

아 제발 미친 심장아. 뛰지 말아줘.
탁탁, 제 옆자리를 치는 호원을 보니 앞머리가 몽글몽글. 있으나 없으나 잘생기긴 했다만.
근데 호원이는 앞머리 내린 것보다 까는게 더 멋있는거 같아. 라고 마음으로 말을 한다는게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뉴런탓에 입밖으로 그대로 나오고 말았다는 사실을 안건 그 호원이라는 친구가 원래 뭘해도 좀 멋있긴 하지. 라는 말을 내뱉은 호원의 대답을 들은 후였다.
 
 
"근데 뭐하냐 진짜. 내외해, 나랑?"
"아닌데?? 전혀 아닌데?"
"그럼 더 붙어. 뭐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네."
 
 
다시 잡아 끌려지는 어깨. 이러다 진짜 한 고작 살이지만 여튼 성인이자 형아인 제가 가끔은 저를 보고 설렌다는 사실을 들킬까 부러 더 붙어 설명을 시작하니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봐봐, 얼마나 잘들려. 하는 핀잔.
 
 
"근데 너 술냄새 난다?"
"치사해서 이 말은 안하려고 했는데..넌 왜 자꾸 형한테 야자 트냐."
"어제 술먹었어?"
"쫌, 마시긴 했지만.."
"누구랑?"
"우현이밖에 더 있...."
"아, 그 형이랑 술 먹지 말라니까."
"이게 근데 진짜! 우현이는 형이고 나는 너..."
"그 새...그 형이 저번에 형 꽐라 만들고 집에서 같이 잔 형 아니야? 그날 나 과외도 날려먹고. 연락 안돼서 독거노인 혹시 어디 아픈데 누가 챙겨주지도 않겠다 싶어 불쌍해 집에 갔더니 세상 무서운줄 모르고 그 새..그 형이랑 같이 한 침대에서. 씨발, 생각하니 열받네?"
"뭐, 뭐가 그렇게 열이 받아."
"그렇잖아! 어! 내가 고 3인데, 신경을 존나...진짜."
 
 
호원은 문득 말문이 막혀 더 성질을 부려본다. 우기다 보면 동우가 저의 페이스대로 넘어온다는 것을 너무 잘 아는 탓이었다. 저 형은 머리는 좋은데 참 멍청하단 말야.
 
 
"모의고사 등수 떨어졌는데 과외 빼먹으면 내 성적 형이 책임질거냐고. 나 M대 가야하는데, 형 때문에 못가서 그 개같은 댄스 동아리에서 그 새...그 형이랑 너랑 맨날 술먹고 둘이 퍼자는거 보라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안되지!

동우는 호원이 어느 핀트에서 화가 났는지를 모르는데다, 벌써 반 년은 더 된 얘기를 마치 하루 전날 일 얘기하듯 우리고 또 우리고 또 한 번 더 우려내 꺼내는 작태에 이제는 좀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 하고 싶었지만 말이야 바른 말이지 반년 전이고 일년 전이고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죄진게 사라지는건 아니니까.
성실을 모토로 하는 장동우 선생의 사전에 숙취로 인한 업무 태만은 스스로도 용서하기가 좀 어렵기도 하고.
 
 
"아무튼, 그 새..그 형이랑 두 번 다신 술먹지마."
"아니..뭐..."

동우는 그냥 웃기로 했다.
 
 
 
 
 

***
 
 
 
 
넌 웃는 얼굴 하지마.
성규의 짜증을 들으며 동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일주일에 두 번이나 있는 과외 날 중 하나로 오늘은 심지어 한시간 보강이 필요한 날인 것이다. 아하하 웃다말고 또 한숨을 휴.
 

"정신병자 같으니 한숨 쉬든가 웃든가 하나만 하실게요. 그 고딩이 그렇게 괴롭히냐?"
"우리 호원이 착해요, 말버르장머리가 없어서 그러지."
"근데 과외하는 날만 되면 왜 정신이 반은 나가 있어?"
"몰라, 몰라, 몰라. 으...형님이 오늘만 나 대신 가주면 안돼요?"
"너 저번일 기억 안나냐?"
 
 
저번일이라, 하면.
동우가 헐벗은 호원을 보고 심장이 두근 거린 그 다음 과외 날 도무지 불경한 그 마음으로는 호원을 볼 수 없을 것 같아 병을 핑계로 성규를 대신 보냈던 날을 말하는것 같다.
원체도 까칠해 그닥 살가운 성격이 아닌 성규이기도 했지만 호원이라고 해서 호락호락한 미성년자는 아니었던 관계로 동우 아파서 내가 대신하러 왔다, 책펴라. 하는 말에 근데 왜 반말하세요? 로 시작된 신경전은 결국 진도를 두어장도 못나간채 지금 니 실력으로는 우리 학교 올 생각 하지도 마라, 로 끝난 그 날을. 나 그 학교 가면 선배 취급 받을 생각 하지도 마요, 했다던 그 일을.
 
 
"오늘은 진짜 가기 싫으다.."
"대체 왜?!"
"오늘 호원이 축구 하는 날이란 말야..."
"그게 뭐?"
"…그런게, 있습니다. 형님 나 가요. 우현이 오늘 나한테 연락하지 말라고 좀 전해줘."
"그건 또 왜??"
"몰라, 과외할 때 우현이 연락오면 공부하는데 방해된다고 싫어해요. 약점 잡힌거 있단말야."
"짱똥 저거 모질이 참 어쩌면 좋을까. 고삐리한테 약점 잡혀 빌빌거리기나 하고."
 
 
아 웃지마, 임마!

성규에게 턱을 한 번 쥐어잡힌 후 동우는 터덜터덜 예대를 나선다. 오늘은 좀 지각을 해야겠다. 그럼 옷도 다 갈아입고 있을테니. 어쩌다 장씨 집안의 귀한 아들이 호모 귀신이 씌여 고딩을 상대로 설레는 연정을 품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러다 말겠지, 하는 작은 희망을 가지고 버스를 두어대 보낸 뒤 제가 늦으려는 속셈을 어떻게 알았는지 일분 늦을 때마다 십분씩 연장이라는 카톡이 오는 바람에 한 대 더 보내려던 버스의 문을 쾅쾅 두드려 민폐남으로 등극 해버린 비운의 장동우라지요.
 
언제부터 지가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했다고. 하긴 고3이 공부 열심히 한다는데 기특해야 마땅하지만은 성규의 말이 자극제가 되었긴 했는지 코피 터지게 공부한 끝에 지금은 큰 실수만 안한다면 원하는 학교에 원하는 과도 들어갈만한 성적을 만들어 놓은 호원인지라 원체 잘하던 국어보단 사탐이나 수리를 올리는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언어에 무슨 큰 자부심이라도 느껴야 하는건지 언어 과외는 오늘처럼 십분을 아까워 하면서까지 열심히 하는 것이다.

 
[한시간 오십분 추가~]
[차 끊겨.....~.ㅠ]
[근데?]
[그렇다고......]
[두시간]
 

결국 정류장에서 내려 전력질주. 얘는 뭐가 이렇게 학구열이 불타는거지. 흐르는 땀을 긴 소매로 닦으며 초인종을 누르자 호원의 어머니 대신 멀끔한 얼굴의 호원이 반긴다.
 

"두시간 이십분."
"노동력 착취도 아니고 좀 너무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수험생의 십분은 사실 열시간과 같은데 이것도 많이 봐준거야."
"너, 니가, 너가, 어, 너가 공부를, 어! 언제부터..."
"말 바보 왜 늦었어?"
"아니.. 엉아가 사회 생활 하다 보면 쪼금 늦을 수도 있지 이렇게 매몰차게 할 것 까지 있냐?!"
"남우현형이랑 놀았어?"
"아니거든?"

성규형이거든!

"놀다 늦은거 맞네. 우리 엄마 지금 제주도 가서 망정이지 엄마 있는데 이렇게 늦었어봐. 뭐라고 생각했겠어?"
"그거야.."
"내가 특별히 엄마한테 말 안하고.. 아까 전화왔단 말야, 형 치킨이라도 시켜주라고. 근데 내가 뭐한줄 알아? 연기했어, 연기."
 
형, 치킨먹을래? 하면서 있지도 않은 형한테 말 걸었다구.

"호원이라는 친구가 연기도 좀 하더라고. 아무튼 그래서 엄마한테는 형이 지각한거 안 들킬 수 있었지. 이래도 모르겠어?"
"진짜 어머님 전화 왔었어??"
"그래. 근데 내가 형 혼날까봐 엄마를 상대로 사기를 치는 불효를 저질렀는데 지금 그깟 막차가 중요해? 그냥 자고 가면 되잖아."
"그치..불효는 안되지....진짜 미안하다... 그냥 자고 가면 되는...응?"
"일단 씻고 옷부터 갈아 입으실게요."

 
훠이, 훠이 하며 뭔가 당한 것 같은데 그게 뭔지는 모르는 채로 동우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틀린 말은 없는데 찝찝한 이 기분은 뭐지. 대체 뭐지. 고개를 갸우뚱 하고 어쨌든 뛰어오느라 땀이나 그러겠거니 싶어 우선 홀랑홀랑 벗어던지고 샤워.
입을 거 문 앞에 놨다. 하는 말에 역시 우리 호원이 말을 버르장버리 없게 해서 그러지 애가 참 배려심이 넘친단말야. 하고 괜히 히히 웃어본다.
 
문을 슬쩍 열고 더듬더듬 옷이 있을 법한 지점에 훅 낚아채는데 팔목이 그게 뭐냐, 하는 핀잔에 다시 심쿵. 지는 뭐 무쇠팔이라도 되는줄 아나 봄. 하면서도 이상스레 걸그룹도 아닌데 심쿵하게 생겼어. 초야를 치루는 신부도 아닌데 갑자기 왜 때문에 떨리는걸까. 그럴리는 없겠지만 호원이 문이라도 벌컥 다 열어재낄까 싶은 마음에 얼른 팔을 다시 집어 넣고 딸깍 문잠그기.
뭐 볼 거 있다고. 하는 소리는 그냥 못들은 척 하기로 했다.
얼른 옷 입고 과외 하면서 살살 빌어 토탈 두시간으로 쇼부보고 집에 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손에 쥐인 옷을 보자 이 황당함은 뭐지.
 
 
"이게 뭐야!"
"옷."
"내 나이가 몇인데!!"
"스물."

치매야?

아이야, 내가 몰라서 물어본게 아니잖니. 흐윽. 한숨을 쉬며 주섬주섬 공룡의 모양새를 한, 호원이 언젠가 수학여행 때 벌칙에 걸려 입었다며 징징 거렸던 기억이 나는 그 잠옷을 껴입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문밖을 나서자 벌써부터 놀리고 싶은 입꼬리를 한 채 문 앞에 떡하니 서있는 호원이 보이고 아니나 다를까 푸하하하하, 그대로 빙하 타고 가실게요! 신이 나 외치는 호원에게 오랜만에 설렘으로 인한 두근거림보단 빡침으로 인한 심장박동수 증가를 느낀 동우는 모의고사 7등은 책이나 펴실게요. 하고 쿵쿵 책상옆에 앉는다.
 

"5등이거든?"
"그거나 그거나."
"엄연히 다르지!"
 
근데 내 등수는 어떻게 알았어?
 
"열이가 그러던데, 너 조만간 죽는거 아니냐고."
"내가 왜?"
"쉬는시간에도 공부한다며. 안하던 짓 하면 죽는다는데 무섭다고 전화왔더라, 어제."
"웃기는 새끼네, 왜 지가 너한테 전화를 해."
"언어는 올랐다며. 우현이 수리 잘했어, 언어 말고 수리해 이제. 내가 부탁해볼게."
"어떻게 된게 사람이 단점밖에 없냐."
"누구? 나? 갑자기 왜??"
"장점도 없고 눈치도 없고."

…저걸, 내가.
 
 
어휴. 있는 건 장점 뿐인 것 같은 이호원이 저에게 단점 밖에 없단다. 난 글렀어, 망했어. 한 번은 자신이 여자였다면 좀 나았을까에 대해 생각해봤는데, 이 상태라면 여자였다면 오히려 더 절망적이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지금이야 남자니까 어차피 안돼, 라는 서글픈 위안이라도 할 수 있다지만 여자인데도 이렇게 까인다면 진짜 그거야 말로 노답. 장노답.
 
 
"그래.. 나는 눈치가 없고 수험생은 시간이 없지요. 어서 책 펴시지요 수험생 나으리."
"오늘은 남우현형한테 연락 안오네?"
"응. 남군 요즘 바뻐. 불러주랴?"
"남군? 남..군?"
"남씨니까 남군이지."
 
 
장동우 너 진짜 웃긴다.
 
"아니 뭐가 또! 책 펴! 책!! 책이 지금 이호원님 저 좀 활짝 펴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고 있잖아!"
"남군이 뭐야, 남군이! 니가 무슨 열여덟살 먹은 기지배야? 아주 이러다 수애한텐 언니라고 하겠어!"
"그 전에 너야말로 나를 형이라 불러야지 않겠냐...?"
"남군...씨발..."

저걸 씹어 먹어버릴까.
 
절대로 장동우는 태권도 유단자 호원의 난데 없는 욕에 쫄았다거나 움찔했다거나 눈치를 봐서가 아니라, 그냥 인류 평화를 수호하는 차원에서 호원앞에서는 그게 무엇이 되었든 우현에 대해 얘기를 하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쟤는 진짜 왜이렇게 우현일 싫어해. 우리 나무 얼마나 착..얼마나 귀...얼마나 멋....얼마나 흠...아무튼 간에. 남우현이라고 하면 남녀를 불문하고 십분이면 사람을 요리조리 요리하는 인간쉐프로 조련이라고 하면 어디 내놔도 뒤지지 않는 조련 능력자인데 역시 인간의 관점으로 이해하기가 좀 난해한 호원에게는 먹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너는 엉아를 너무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 아주 너 그러다가 혼나요."
"에구머니나. 무서워라."

저거 나 놀리는거 맞지. 두근거리던 심장을 멎게 해주어 고맙다고 해야하나. 언제부터인지 예전의 말 안듣지만 그런데로 귀여운 맛이 있던 호원을 보던 그 감정이 돌아온 것 같아 동우는 내심 다행이었다. 그래, 계속 나를 놀리거라. 계속 나를 열받게 하거라.
놀리는게 분명한데도 평온해지는 저의 표정이 뭔가 이상했는지 호원의 얼굴이 심각해진다.
삐졌어..?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오히려 조금은 고마운 마음이 들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자 한층 더 심각해지는 얼굴.

미안해요, 화내지 마.

이런, 빌어쳐먹을..! 또 심장이 요동쳤다. 남자의 얼굴을 하고 백년 만에 존대를 쓰는 그 모습에, 내 심장. 오마이갓. 얼굴이 빨개졌을게 분명하다. 쪽팔리고 또 쪽팔려. 연하남에게 빠져 풍덩풍덩 헤엄도 못치고 가라앉다니. 나름 가오 잡으며 살아왔는데, 내가 이 구역의 댄스머신인데! 밤 열한시에 사탕키스를! 연하도 아닌 무려 연상의 누나와 했던 내가! 이 장동우가. 너무 놀라 어버버 거리는 사이 호원의 잘생긴 얼굴이 다가왔다. 오늘은 왜 하필 또 깐호원이야. 샤워했을텐데 왜 깐호원이냐고!
 
 
"형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
"가, 가, 갑자기 왜 그러냐! 너 진짜 안하던 짓 하지마 무섭게!"
"나 진짜 진지해."
"뭔..데?"
"나 형네 대학 갈거라고 했잖아."
"근데..?"
"나 입학할 때 까지 미팅, 소개팅 이런거 다 하지마."
"그건 왜...?"
"내가 입학해서 예쁜 여자 먼저 만나게."
"아..."
 
 
정말 참신한 개소리를 하는구나, 니가. 엄마, 저는 오늘도 실망을 해요.
나는 왜 이런 놈을 상대로 연정을 품게 되었는가. 꽃같은 소녀를 마음에 품어도 시원치 않은 마당에, 왜! 이런!! 정신나간 놈을! 나는 역시 얼빠였나. 아냐, 자신은 결단코 명수를 상대로 심장이 뛰어 본 적은 없다. 그렇담 얼빠는 아니라는 소리지. 그럼 몸빠...? 아냐, 역시나 나는 남우현을 보고도 설렌적이 없다. 수십번을 웃통깐 남우현을 봤지만 저거 또 누구 홀리려고 저러나, 쯔쯔. 는 했어도 설렌적은 없다고.. 하늘이시여,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
 
 
"아참, 나 다음주 과외 시간 바꿔야 돼."
"왜?"
"축제 때문에."
"축제에 형이 뭐하는데?"
"묻지 마라. 그거 때문에 엉아가 괴롭다."
 
 
아닌게 아니라, 입학하고 첫 축제에 저에게 다가온 고난은 다름 아닌 여장이었다. 이런 좟같은 법이 어딨냐며 따져물어도 원래 가위바위보를 잘 못하는 제 탓인거다. 여장이라니, 백년치 놀림감일거다 이호원한테.
 
 
"뭐길래 괴롭기까지해?"
"하...."
 
 
때마침 카톡, 하며 울린 핸드폰 액정엔 배드걸굿걸 연습해라. 는 성규의 카톡. 연달아 내일 의상 피팅이니까 마음 비우고 오거라. 하는 친절한 뒷말까지.
 
 
"배드..뭔...걸?"
"하아..."
 
호원의 얼굴이 미묘해진다. 저 표정은 도무지 해석이 안되는데 어쨌든 기분이 좋을 때의 표정은 아니다. 생각만해도 화가 나나. 하긴, 상남자를 표방하며 애교 한 번 해보라면 아나운서 발음 테스트 하듯 히,융,히,융 그딴걸 애교라고 하고 앉은 앤데 여장 하는 스승이 달갑진 않겠지. 근데 나라고 좋아서 하는게 아니니 그냥 니가 이해해주면 좋겠다. 라고 동우는 속으로만 말했다.
 
 
"치마입어?"
"너 진짜 공부 안할래?"
"응. 안해."
"얜 정말 왜 잘 나가다 말을 안들어.. 뭐가 문제야, 또!"
"너."

진짜 문제야.

"문제라서 미안하다만.. 그래도 과외비 받은 값어치는 형이 좀 하게 해주라, 호원아아.."
 
옳지, 옳지. 잘한다. 책펴고... 근데 이거 수학책 아니야?
 
"보면 몰라?"
"수학 다 까먹었는데. 나 문과였잖아."
"알아."
 
 
얘가 이젠 또 뭐하자는 건가 싶어 으음?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니 또, 그 눈. 동그랗고 검은 눈동자가 올곧게 자신의 눈 안에 꽉 들어찬다.
나 공부하는 거 감독해. 하는 말에는 아 얘가 진짜 고삼 스트레스가 심하기는 한가. 싶을 정도여서, 언어는 사실 가르칠 것도 더는 없는데 차라리 취약한거 하게 하는게 낫겠다 싶은 마음에 고개를 끄덕끄덕.
 
화이팅, 화이팅. 작게 기합을 넣어주자 찌푸려지던 미간이 꿈틀. 입술을 깨무는가 싶더니 하하, 하고 결국 참지 못하고 뱉어내는 웃음에 마주보며 저도 모르게 또 웃음.
 
 
"애교부려봤자 게임 안 시켜줘. 나한테 눈 떼지 마."
"아하하..."
 
속셈을 간파당한 동우는 성규가 말한 그, 예의 웃는 얼굴 하지마 의 웃는 얼굴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물론 호원을 보는건 나쁘지 않다. 잘생긴 얼굴 보는거 나쁘지 않아. 심지어 좋다. 하지만 좋은 것도 삼세번이지 주구장창 문제푸는 모습을 아무것도 못한채 지켜보아서 대체 제게 좋을게 뭐란 말인가. 하지만 거절불구자의 삶이 늘 그렇듯 끄덕끄덕. 게, 겜 그거 애나 하는거지. 하하하. 하며 동그란 뒷통수에 몰래 주먹을 날리고 털썩 뒤로 기대 앉았더랬다.

예전엔 자신보다 작았던 것 같은데. 아주는 아니어도 지금은 저보다 키도, 몸도 커져버린 호원은 이따금은 소년같고 이따금은 남자 같다. 저 나이대의 특권인가 싶다가도 마냥 애같은 성열이나 마냥 소년같은 명수를 보면 꼭 그런것 같지 만도 않은데. 그래봤자 사개월 남짓의 차이로 형이라지만, 나도 저 나이대에 저랬던가 싶은 기분도 들고.
 
사각사각 정갈하게 내려앉는 호원의 샤프소리를 들으며 몇 년 후의 호원은 또 어떻게 커져있을까. 그 때의 내 마음은 또 얼마나 더 커졌을까, 혹은 그 때는 작아져있을까. 혹은 없어져있진 않을까. 와 같은 생각을 하며 동우는.
잠이 들었다. 좋은게 좋은거고 졸린게 졸린거니까.
 
잠결에 누워서 자자. 누워서. 하는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고 쭈그렸던 몸이 펴지는 것도 같고 토닥토닥 이불도 덮어진 것 같고. 이마에 어지러이 흩어져 간지럽히던 머리카락이 정돈된 것도 같지만, 한 번 잠에 취한 이상 깨지지는 않아서 그냥 그 기분 좋은 손 짓에 몸을 맡긴 깊은 밤.
 
이마, 눈, 코, 입술.
 
조심스레 닿는 손길이 있었다.

‥너 대체 뭐냐.
 
짙게 내려 앉은 한숨이 있었다.
 
 
 
 
 
 
 
 

 

 

청 춘 지 옥

 

원래 장동우는 긍정왕이었다.
좋은게 좋은거지. 그래, 웬만하면 다 좋을 수 있었다. 오후에 가발을 쓰고 의상을 입은 저를 보며 남자일 때보다 낫다며 놀리는 우현을 야리는 것도, 조신하게 좀 앉으라며 벌려진 다리를 오무려주는 성규의 거친 손길 까지도, 충분히 좋았다. 게다가 철이 지나도 한참은 지난 노래에 맞춰 춤 좀 췄다고 수많은 환호를 받으며 거지같았던 축제에 종지부 찍은 채 일등을 한 건 그 중에서 가장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복학 후 십년은 더 학교를 다닌 것 같은 선배의 끈적한 눈빛은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는 것이다. 괜스레 짧은 치마를 탓하며 성규가 던져주고 간 담요를 한껏 끌어 올린채 저의 옷을 가지러간 성규형이랑 남우현은 대체 언제 오는가에 대해서만 온 신경을 집중한 채 핸드폰을 뽀시락 뽀시락. 어디야, 하는 호원의 카톡엔 뭐라고 답을 해야 좋을까 고민고민 하는 사이 아예 의자 하나를 잡아 끈 채 다가오는 고선배에 움찔.

여기 인문대 앞 천막..까지 쓰는데 어느덧 코 앞에 까지 다가온 복학생에 말을 마무리 하지 못하고 전송. 입학하기 전에 학교 한 번 와봐야겠다며 땡깡을 부린 날이 왜 하필 자신이 여장을 한 꼬라지를 보여줘야 하는 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우현에게 사진이 찍힐대로 찍혀 인스타든 트위터든 다 날려버릴게 분명하니, 차라리 실물을 먼저 보여주는게 충격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반 포기 상태로 하염없이 천막 끝만 바라볼 뿐이었다.


 

 

 

청춘지옥 02.청춘의 닻

 

 

 


 
"동우랬지?"
"예..예. 하하하."
"왜 몰랐지, 너 같은 애 있는걸."
"그, 글쎄요. 하하.. 뒷풀이 안 가세요?"
"뒷풀이 보다 이 쪽이 더 재밌는 거 같아서."
"뒷풀이가 더 재밌을 거 같은데.."
"이건 뽕이지?"


하며 가슴께를 꾸욱.
아니, 아무리 뽕이라지만 이 새끼가 미친건 아닌가 싶어 쳐다보다 이내 정말 순수하게 뽕인지가 궁금해서 물어봤을 수도 있으니 뒤로 물러서며 예예, 휴지요. 휴지. 하고 손을 치워내자마자 이번엔 담요를 들춰내곤 허벅지에 닿는 손가락.
호원이나 되니까 같은 성별이어도 떨리고 혹하는거지 남자라고 좋은게 전혀 아닌데. 스킨쉽도 친하니까 아무렇지 않은거고 상대가 낯설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장동우에게 남아 있는 최소한의 눈치가 이 새끼는 존나게 위험한 새끼임이 분명하다 경고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기지배도 아닌데 뺨을 칠 수도 없고 대체 이걸 어찌 해야 할런지. 궁지에 몰린 쥐마냥 눈동자만 왔다갔다 하며 대체 성규형은 언제 오는거야 시간을 가늠하는 새 허벅지가 탄탄하다며 주물주물. 이건 진짜 아니다 싶어 벌떡 일어서려는데 천막이 열리며 보이는 얼굴은 아 쎄이 호. 유 쎄이...


"호원아!"
"손을 씨발, 어디다 갖다대."
"교복보니까 학생인 것 같은데, 말이 심하네. 나 동우 선배야."
"아, 선배요? 근데 내 눈엔 그냥 씨발새끼로 밖엔 안보여서, 죄송."


땀이 맺힌 호원의 얼굴이 전에 없이 무서워 동우는 조금 뒤로 물러섰다. 떼기도 전에 우악스럽게 잡아 끌려 종잇장처럼 끌려가는 복학생을 보며 혹여 복학생은 장난일텐데 쟤가 오해를 해 괜히 사고가 날까 싶어 그런거 아니야, 기분이 쫌 드럽긴 하지만 그래도 설마 남자인 나한테 뭐 다른 맘 있었겠냐. 하며 말려는 봤다만 저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결국 고선배의 멱살을 잡고, 저러다 주먹질이라도 하게 되면 저의 형아로서의 체면도 체면이 아닌데다 수능도 얼마 안남긴 상태에서 잘못될까 놀란 마음에 익숙하지 않은 하이힐에 발을 동동. 결국 뒤로 요란한 소릴 내며 자빠지고 그 소리에 호원이 복학생을 내던지고 저에게 달려온다. 어휴, 진짜. 세상 한심하다는 표정을 한 껏 지으며.


"넌 진짜, 사람을, 진짜..!"
"야 나 그래두 일등했다. 엉아 학식 한 달 무료.."
"부탁 하나만 하자."
"또 뭐? 부탁 귀신이 들렸나 이게. 미팅 안해, 소개팅도 안해! 너 다 해쳐먹어, 예쁜여자 다 만나! 남는 여자 내가 만날테니까!"
"귀엽지마."


쓸데없이 갑자기 예쁘지도 마.


"‥너, 멘트가 쫌.. 심지어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기도 하고..."
"눈치가 없는건 잘 알겠으니까, 그건 괜찮으니까."


아직은 내 눈에 보이는데 있어.


"5개월만 있으면 이 개같은 교복 벗고, 옆에 있을거니까."


그리고 이호원은 정말로 저의 일년 후배로 들어왔다.

 

 

 


***

 

 

 

 

저 새끼, 저거 싸가지 진짜.


"귀엽잖아, 형 그 때 말이 심했지."
"내가 자극줬으니까 쟤도 우리 학교 온거야. 야 이호원 너 진짜 쥐어터져 볼래?"
"형 호원이 태권도 3단인데.."
"내가 진짜, 마음이 넓어서 봐줬다. 남우현! 남우현!"


만만한게 우현이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래도 난 규지지!하자 기특하다는 듯 뒷통수를 쓱쓱. 그나저나 이호원이 은근히 뒤끝이 있네, 싶어 성규형한테 잘 좀 해. 하자 호원의 시선은 성규도, 자신도 아닌 자신의 뒷통수에 있다.


"호원아? 이호원?"
"집에 가자."
"어? 어어.."


어떨땐 개구지다가도 어떨 땐 너무 진지하고. 사실 몇 년을 봐왔지만 아직도 동우는 호원을 가늠할 수 없었다. 자상한가 싶으면 귀찮아 하고 귀찮아 하나 싶으면 와서 붙잡고. 얘가 나랑 연애도 안하는 주제에 되도 않는 밀당을 하나 싶어 가만히 있으면 호원도 가만히 있는다, 하필이면 제 옆에서.

그렇게 좋아하는 마음은 새록새록 커져 이제는 스스로도 조금씩 인정을 하는 중이었다.
호원을 좋아한다. 동생이나, 사람으로서 뿐 아니라 심장이 떨리는 그런 어떤 존재와 같이. 애 셋은 최소 낳고 사는게 꿈이었던 저로서는 너무나 슬픈 일이지만 마음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건 그 보다 더 슬픈 일이었다.

내버려두면 작아지겠지 하고 대책없이 던져둔 마음에 네가 점점 스며들어 마치 물을 머금은 스펀지처럼 작아지는 대신 한층 무거워졌다. 밀도가 높아진 마음은 크고 가벼운 그런 마음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일련의 생각에 머리가 아파져 잠시 머리를 터는 사이, 조심 좀! 하는 호원의 말소리와 함께 허리가 잡힌다. 다른 생각하다 길바닥에서 넘어지거나 그럴뻔한 적이 많은데 호원이 있을 땐 대부분 지금처럼 그럴 뻔으로 마무리 되곤 했으니까. 호원에게 저의 존재가 새삼 궁금해지는 그런 순간이다.
덤벙덤벙 쎄게 생겨서 바보같이 웃기나 하는 그런 동네 형 혹은 과외 해줬던 형? 손이 많이 가는 형 또는 이전에 언젠가 말했듯 혼자 감당하기 힘든 형? 하긴, 무슨 형이든 어차피 형인거다. 가끔은 동생으로 보는 것도 같지만..

아하하. 하며 건널목을 건너려는데 뭔가 불편한 기분에 허리께를 보니 여전히 제 허리에 있는 호원의 손이라는게 또 어마어마한 크리티컬 포인트라서. 으잌, 이상한 소릴 내고 옆으로 도망치다 결국 넘어지고 만다. 그래, 나는 형소리 들을 자격도 없어. 난 그냥 바보야, 바보. 흑흑. 탈탈 흙묻은 바지를 털며 일어서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는 호원의 눈빛에 한심함이 가득 담겨 있어 입이 바싹 마르는 기분.

아, 우현이 보고 싶다. 남우현이었으면 이렇게 자빠지는 저를 보며 지도 쓰러져서 웃었을텐데. 그럼 나도 웃지 말라며 발로 차줄 수 있는데. 이호원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내려다보기나 하고 정말 참으로 우울하다.
동우는 실로 오랜만에 우울한 감정을 느꼈다. 우울한 감정이라는게 정말 너무 어쩌다 찾아오는 바람에 사실 이게 우울한건지 그냥 바닥에 부딪친 엉덩이가 아파서 짜증이 난건지조차 구분은 안가지만.


"안 아파?"
"아파."

니가 콘크리트에 자빠져봐, 안 아픈가.


"난 자빠질 일이 없으니까."
"잘났다, 너."
"눈 좀 떼게 해줘."
"무슨 눈?"
"…장동우. 제발, 좀."
"뭐가?"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내뱉고 앞서 나가는 호원의 뒷태를 보며 동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한숨이 나올 정도로 한심해 할 필요는 없을텐데. 말이야 바른 말이지 아파도 내가 아프지 지가 아픈 것도 아니고 쪽팔려도 내가 쪽팔리지 지가 쪽팔린가. 오늘은 진짜 호밉상이다.
발끈한 마음에 뱉어낸 말. 호원아 너 먼저 가. 나 우현이랑 한 잔하게.


"술도 못 먹..그러든가. 나 간다."

그리고 쿨하게 돌아서는 너.

빠빠이. 힘없이 손을 흔들고 동우는 남군이라 저장돼있는 번호를 찾아 콜콜콜. 요란스럽게 전화를 받더니 한껏 풀이 죽은 저의 목소리에 까지 말고 포차로 와. 하는 남우현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남우현의 모습. 깐족거려도 눈치는 빠르고 짓궂게 구는 주제에 달래줄줄 아니까 너랑 친구 한다 내가. 터덜터덜 포차로 향하는 발걸음에 조금 힘을 줘본다.

짝사랑은 원래 힘든거지. 원래 기대했다가 실망했다가. 또 기대 했다가 어떤 때는 아주 많이 실망 했다가. 실망하는 저의 모습에 자괴감을 느끼다가도 다시 기대하고. 그런 멍청한 일련의 짓을 반복하다 보면 언제 부턴가는 대체 이 사랑이라는게 해서 좋을게 뭐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데, 그것도 잠시. 사랑에 지는 모든 사람은.

다시 좋아한다, 다시 기대한다. 또, 다시 꿈을 꾼다. 언젠가 나를 바라봐 줄 너를.
그리고, ‥꿈에서 깬다.

 

 

.

.

.

 

.

 


.

 

 


야, 마셔. 마셔. 오늘은 엉아가 책임진다.
나보다 생일도 느린게 엉아 같은 소리 하네.


"정신연령 순으로 서열 정리하자. 이 엉아가 짱똥 너보단 정신 수준이 상당히 높지 않니?"
"야..남군.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보단 낫지."
"성규형 근데 왜 아직 안오지."
"규형 불렀어?!"
"왜, 안돼?"
"안된다기보단.."


또 혼날 것 같단 말이지.
저에게 성규란 존경하는 형이자 좋은 형이자 무서운 형이자 편안한 형이니까. 그냥 아무 생각 안하고 술이나 퍼먹고 싶은 오늘 같은 자리에 썩 어울리는 존재는 아니란거다. 으, 또 통제 당하게 생겼네.


"알콜 쪼랩 주제에 웬 술. 또 먹고 뻗게?"
"오, 역시 양반은 못돼. 규노비."
"님아, 뒤질래요?"


자리에 앉으며 술 잔 부터 채우는 성규의 잘빠진 옆 선을 보며 동우는 눈을 깜빡깜빡. 저 새끼 벌써 좀 갔는데? 하는 목소리가 조금씩 퍼져 들린다.
아냐, 나 더 마실 수 있어. 하자 그래. 우리 동우 더 마실 수 있지. 하며 꼴꼴 소주잔이 다시 차오르고. 오늘은 형이 아무 말 안할게. 하는 술을 먹어 그런지 다정해 보이는 목소리에 역시 난 규지지. 하며 원 샷. 오늘 참, 술이 달다.


"윽.."

는 기분 뿐이고. 술은 쓰다. 한 번도 단 적이 없어. 너 같아. 달다고 생각하는데 늘 쓰다고. 근데 찾게 된다고. 후유증도 크다고, 몹시!


"얘 뭔일 있냐?"
"몰라. 요즘 좀 이상해."
"이상한게 하루이틀이야?"
"물론 늘 이상한 놈이긴 하지만.. 요즘엔 특히 더 이상해. 아까는 전화하는데 남구운...하더라고. 남우현! 남군! 야야!! 가 아니라, 남구운...이었다고."
"음.."

확실히 이상한거 맞네.

"이보시오들...누굴 좋아하는게 이상한거야..?"
"아잇, 깜짝이야! 살아 있었냐?"
"좋아하다니? 이분이 취하셔서 굉장히 지금 신선한 소리를 하시는 것 같은데."
"누구를..좋아하는 마음이 나쁜거야...?"
"얘 대체 왜이러냐?"

아, 형은 좀 가만히 계실게요. 그래서, 동우야. 누가, 좋아..?

"그건 비밀이지, 임마."
"안 취했네 이 새끼. 그럼 한 잔 더 마실게요."

내가 취했다고 더 털어놓을거 같냐? 하며 한 잔 또 꼴깍.

"야, 남우현. 너 저거 엎어지면 니가 책임질거야?"
"까짓거 지지 뭐. 어어 잠깐. 이호원이 웬일로 이 시간에 전화를."

어어. 뭐하긴, 술먹지. 동우랑, 성규형이랑. 어어어. 어어, 그 포차. 어 저번에 동우 자빠진데. 크하하하하. 아 거기 말고, 어어. 앞말고 뒤로 자빠진데. 어. 온다고? 얘 어차피 뻗었는데. 아...어. 뭐..그래.


"온대?"
"어. 사실 이거 실어다 주기 귀찮았는데 호이스 샷. 이호원보고 실어가라 해야겠다."


어차피 그리고 실어가려고 오는 것 같기도 하고.
까지 듣고 동우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네가 보일까.
혹은 뜨면.
혹은 감으면.

 

 

 

 


-----------------------------------------------------------------------

 

 

 

청춘지옥

 


누가 먹였어요?

"맥이긴, 지가 먹었지."
"술도 못 먹는게 뭐 믿고 이렇게 마셨지."
"너 믿고 마셨나보지, 야 너도 한 잔 해. 니가 경영 술고래라며. 오늘 먹고 취중진담 한 번 싸악 해보자."
"취중진담."

그거 취해야 할 수 있는거잖아요.

"‥하고 싶습니다만, 저도."

선천적으로 호원은 취객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처음엔 그냥 좀 잘 마시는건가, 싶다 술자리가 반복되고 자신은 멀쩡한데 쓰러져가는 사람들을 챙기는게 일이 된 후 호원은 깨달았다.
아, 나는 취하지 않는구나. 감미로운 노래처럼 그래 난 취했는지도 모르고 실수인지도 모를 일은 웬만해서는 절대로 할 일이 없겠구나. 그 상대가 알콜무능력자인 동우라면 더더더더욱.

 

 

 

 

 


청춘지옥 03. 취중청춘

 

 

 

 

 


저의 말에 오기가 생겼는지 술잔에 술을 가득따라 주거니 받거니. 결국 호원은 한시간 여 후 뻗어있는 성규의 뒤통수와 우현의 앞통수를 톡톡 두드리며 일어나요, 일어나. 물론 계산은 우현의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칼같이 마무리 하고 택시를 태워 보낸 후 여전히 취기와 잠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동우의 옆에 앉아 본다.


"으으...호어..호야...?"
"너 자꾸 이렇게 술 먹고 정신 못차릴래?"
"미안..근데 엉아가, 속이 상해서."
"뭐가 그렇게 속이 상했는데."
"미애가 왜 좋아?"
"누가 좋대?"
"근데 왜 걔랑 밥먹어."
"동기랑 밥 좀 먹는게 어때서?"
"둘이, 둘이 먹었잖아."
"형배 온다고 했는데 그 새끼가 갑자기 튄거야."
"어휴 눈치도 드럽게 없어가지고...호어나..호야.."
"‥눈치 없는게 대체 누구냐."
"미애가..미애가 너 좋으니까 형배 시켜서 그런거잖아...너는 진짜..똑똑한 척은 혼자, 어, 다...어.."
"말바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저에게 볼을 틀어잡힌 채 주절주절. 미애가...너 좋대. 나랑 너랑 친하니까, 너랑...후아.


"엮어달래, 나랑?"
"그래 임마.. 엉아된 도리로 너의 연애사업을 도와야 하지마는... 근데, 그게 좀 나는..싫거든, 호어나..?"
"왜, 싫은데?"
"아니..미애는 예쁘지만.... 제일 예쁘지는 않으니까, 호원아.. 너는 제일 예쁜 여자, 어.. 세계 삼대 미녀를..만나야 내가..좀, 덜 억울하구.."
"억울..?"
"미애가 예뻐...?"
"응. 걔 경영 탑이잖아."
"짜증나네.."
"미애가 예쁜데 왜 니가 짜증나."
"넌 예쁜애 좋아하잖아.."
"응."


단호한 저의 대답에 축쳐지는 눈꼬리. 강아지였다면 귀와 꼬리를 축 떨어뜨린 채 터덜터덜 케이지 안으로 들어갔을 것 같은 모양새. 근데 동우는 강아지과는 아니고 그렇다고 고양이 과도 아니고. 토끼? 토끼도 아냐. 여우같다. 귀여운데 마냥 귀엽진 않은. 어딘가 털이 복슬복슬한 꼬리가 있을 것 같은, 그런.

 

"미애, 사귈거야..?"
"글쎄. 어떻게 할까."
"그거를..왜 나한테 물어봐 임마...예뻐서 좋담서.."
"예쁘다고 했지 좋다고는 안했어."
"그게 그거지. 으...나 물, 물."

 

호원은 미리 준비해 놓은 생수통을 따 허우적거리는 동우의 손을 잡고 입안으로 꼴꼴 물을 넘겨준다.
술 깨려면 멀었지, 이거. 꾸벅꾸벅 졸려는 동우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붙잡아 입가에 미처 넘기지 못해 흐른 물줄기를 닦아내는데도 가만히 하는대로.
문득 불쾌해지는 기분은 뭐랄까. 사람 손을 너무 탄건가, 아니면 저의 손을 많이 탄건가. 워낙에 스킨쉽에 둔감하니 누가 지금 들쳐 업고 가도 그냥 그런가보다 할 것 같아 한숨이 포옥.


"너 진짜 술먹고 정신 못차릴래?"
"호원아.."
"부르지마."
"호원아... 엉아는, 호원아. 나는.. 너를."


입술을 깨무는 동우를 본다. 이상하게 물기가 가득한 것 같은 풀린 눈이 마주친다. 까만 눈동자. 순진하진 않은데 순수하지.
내가 미안. 형이 다 미안. 하며 결국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무언가 우둑, 하고 끊기는 기분. 내가 그러면 안되는데, 내가. 내가 정말 다 미안. 하며 다시 닿아오는 눈물이 고인 그 까만 눈동자에 그만.

 

또 넘어지려고 저게.
언제부터인가 시야에 가득 담겨있던 동우가 있었다. 팔랑팔랑 찡그리는 법 없이 뛰다 넘어지고 넘어진 제 모습에 또 웃다가 넘어지고. 입다물고 있으면 서늘하기 그지 없는 눈매에 긴장했던 것도 잠시, 그 눈매가 휘어지며 갸웃대는 고개가 주는 강렬한 갭에 처음에는 그냥 좀 어디 모자란가 싶어 호기심으로 다가간 마음이 이만큼 커진건 정말 자신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

놓아두면 작아지겠지, 하던 마음은 놓인 상태 그대로 점점 자라났다. 자라난 마음에 가려 동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호감의 시작은 늘 아무것도 아닌 작은 일상이다.
저에겐 문제를 풀라고 시켜놓고 전날 과음했는지 술냄새를 폴폴 풍기며 반쯤 얼이 나간 얼굴로 옆에 널부러져 있던 작은 사내는 쿵, 하고 바닥에 부딪친 주제에 세상 모르고 잠이 들어 있었고 헤, 벌어진 입술이 얄미워 억지로 닫아 놓고 남은 문제를 마저 풀다 다시 힐끔.
 
웅크리고 앉은 몸이 불편해 보여 베개라도 베어줄까 하는 마음에 다가서 머리를 받쳐 주고 또 문제를 몇 개. 그러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또 신경쓰이는 바람에 좀 더 옆으로 다가가 머리카락을 치워내자 날카롭게만 보였던 눈매가 온순하게 쳐져 있는 모습이 신기해 자신도 모르게 살살 눈가를 누르자 귀찮은지 움찔 하다가도 고롱고롱 잘도 자는 것이다.

업어가도 모르겠어. 정말 모를까. 하는 마음에 몸을 들어 보는데, 정말 모른다. 기왕 일으킨거 침대에 눕히자 싶어 좀 더 꽉 안아드니 어깨로 떨어지는 얼굴이. 오분만..하며 웅얼거리는 그 목소리가. 무방비한 저의 허리를 잡는 그 반지 가득한 손이.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던 그 순간이.

 

마치 지금처럼 생생해서, 호원은 쭈그려 앉은 동우의 고개를 손으로 잡아 다시 한 번 눈을 맞춘다. 술에 취한 건 아니지만 너에겐 실수일지도 모를 지금을 기억하길 바라며.


"호원아, 형이..내가..."
"말하지 마."
"너를 보면 나는, 왜.."

…자꾸 떨려.

하는 말을 듣자마자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도 모를 그 입술을 감쳐물었다. 놀라 커졌다 감기는 눈동자에서 끝내 떨어지는 눈물을 보며 저의 눈도 조용히 감아본다.

추운 새벽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

 

 

 


여긴 어딘가. 나는 또 누구인가. 떠지지 않는 눈을 깜빡깜빡. 익숙하진 않지만 모를 정도는 아닌 풍경이 그제야 눈안에 들어찬다. 아, 나 어제 취했지. 안그래도 우울한데 미애가 오빠 저 한 번만 호원오빠랑 엮어주세요, 하는 카톡에 성규형이랑 우현이랑 같이 생각보다 많이 마셨었지. 그리고 정신이 끊기기 직전엔 호원이도 본 것 같은데, 그건 내가 너무 보고 싶어서 환상을 본 걸수도 있어.
 
정신차리자, 장동우. 치매가 오기엔 아직 넌 어려. 고개를 탈탈 털고 일어서려는데 허리에 감긴 팔이 이제야 걸리적 거리고 그 팔이 호원의 것이라는데 심장까지 걸리적.
그래, 익숙하진 않지만 모를 정도는 아닌 그 풍경이 그 누구도 아닌 호원의 방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곤 피가 식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피는 식는데 왜 심장은 뛰고 그래. 입술을 깨물자 뭔가 아픈 느낌. 어쩌지, 어쩌면 좋지. 뒤에서 저를 안은채 곤히 잠든 것 같은 호원이지만 언제 깨어나 폭발하는 저의 심장을 알 지 모를 일이었다.
조심조심 팔을 풀어내려 손을 갖다 대자, 좀 더 자. 하는 잠에 취한 잠긴 목소리에 심장은 이차 폭격. 더 자라고? 이 상황에?
어느새 다 달아난 잠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일어서려다 허리에 감긴 팔이 순식간에 저의 몸을 잡아 돌리고 잔뜩 피곤해 보이는 주제에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보인다.

토닥토닥 등을 끌어 안고 뒤통수를 감싸쥔 손바닥에 저절로 호원의 어깨에 얼굴이 닿고 쿵쿵, 하는 심장소리가 점점 짙게 들려오는 것에 좀 더. 어제의 기억이 떠올라서.


"그만 떨어."

익숙해 져야지, 이런 것도.

"난 취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실수도 아니야."


그렇게 떨리는 말 해놓고 떨지 말라고 하면 반칙 아닌가. 하면서도 동우는 좀 더 그 품으로 파고 들어본다.

 

 

.
.

 

.


.

 

 


.

 

 

 

그래서, 뭐가 문젠데.

"‥아직 좋다는 말을 못들었어."
"너, 뭐. 싸이버 연애하냐?"
"아니거든!!"
"근데 할 거 다해놓고 좋단 소리 못들었다는건 대체 뭐야."
"야.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데... 다 안했어, 아직."
"뭐래 이 무늬만 훌륭한 쪼다가...어쨌든 이건 그냥 너 혼자 사귀는거 아니야?"

헤이엄, 헤이엄, 아쿠아맨 장동우 아니고? 하며 잔뜩 신이난 얼굴을 한 우현을 한대 쥐어박을까 하다 한숨을 폭.

"그런 애 아니야. 얼마나 챙겨주는데. 가끔 내가 헛소리 심할 때 정색하는거 말곤.."
"가끔 정색하는거면 널 보통 좋아해서는 그럴 수가 없을텐데. 나는 늘 정색하잖아, 안좋아하니까."
"남군..너 진짜 쳐맞을래요..?"
"에스엠 플레이는 사절입니다만."
"너한테 물어본 내가 병신이지."
"내가 물어볼까? 너 좋아하냐고?"
"미쳤냐??"
"모르지, 호원이 새끼가 원체 표현력이 부족하니까."
"안 부족하거든, 어제도 나 술...응..?"
"이호원 맞네. 와, 장동우. 너 언제...너.... 내가 너를 그렇게.. 자식새끼 키워 봐야 소용없다더니, 그 호랭이 새끼가 결국 내새끼를.."
"근데 내가 왜 니 새끼야, 이런 같잖은 새끼를 봤나..."

라지만 사실 지금 내가 누구 새끼인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원래 남 속이는데 취미 없었고 소질은 더더욱 없던 탓에 눈치라면 지나가던 새도 떨어뜨릴 우현에게 걸리는 건 사실 일도 아니긴 하다만, 심각해진 우현의 표정을 보니 호모가 되어 버린 친구를 버릴지 말지 고민하는건 아닐까 싶어 겁도 좀 나고.

아니, 내가 호모 취급 받는거야 먼저 좋아한 죄인이니 상관없다만 호원까지 그런 취급을 받는건 싫다. 그리고 어쩌면 우현의 말대로 혼자 하는 연애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도 없는 상황이기도 하고..


"그 새끼를 내가 진짜...! 넌 이거 성규형 알면 진짜 죽어."
"왜..?"
"성규형이 너 예뻐해, 안 해?"
"맨날 구박만 하는데. 나는 성규형 좋아하는데, 규지지!"
"어휴..지랄 진짜. 암튼 구박하는건 니가 그럴 짓을 하니까 그러는 거고. 그 형이 너 딸 낳으면 지 아들이랑 결혼 시킨다고, 어? 저번엔 이름도 짓더라."
"감동적인 느낌적인 느낌이와. 그리고 나도 성규형 예뻐해. 근데 어쩌냐..내가 애는 못 낳는데.."
"그러니까 임마..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동생이 지 며느리도 못 낳아 준다는데 그 형이 가만히 있겠냐고. 심지어 짝사랑! 아주 육체만 홀라당 가져다 바친!"
"야, 안 바쳤다고 했다... 호원이 그런애 아니거든?"

걔가 아니라 니가 그런애거든?

갑자기 뒷목이 쥐어 잡히고 놀라 돌아본 곳엔 성규가 무시무시한 눈을 한 채 동우를 쏘아보고 있었다. 아이, 이 형님 참. 바들바들 떨며 대체 이 대화의 어디까지를 들었을지에 대해 가늠하는 우현의 옆에서 아하하, 형. 언제 왔어요? 하며 상황파악 못한채 웃고 있는 동우의 머릿속엔 이렇게 멱살잡힌 모습을 호원이 본다면 참 가오가 안살겠다, 라는 것뿐이었다.


"언제부터야?"
"무가..뭐..무...가요..?"
"언제부터냐고."
"그것이..음..."


지금 그게 문제야, 형. 언제부터인지를 모르겠다니까. 심지어 시작을 한건지 만건지도 모르겠다고.
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 동우는 그저 눈을 데굴데굴. 우현에게 헬프를 요청하는 눈빛을 보내 보고 명색이 가, 족같은 친구로서의 사명감에 아직 썸이래. 썸. 하며 말 그대로 족같은 말이 내뱉어 지는데 좌절하는 아직은 열렬한 청춘.


"뭐..? 썸...뭐?"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요 형. 아니, 그 뭐냐. 내가 호원이를 좋아해, 좋아하지. 동생인데."
"키스했냐?"


역시 돌려 말하는 법이 없는 성규와.

"흐..아. 했나..? 했을까...?"
"진짜 쥐어터져야 제대로 말 할래?"
"했어요."

딥키스.

돌려서 대답하는 방법을 모르는 동우까지. 우현은 그냥 모든걸 놔 버리기로 했다.

하.. 동우는 터져나오는 한숨에 눈치를 빼꼼히 보다 저 멀리로 지나가는 호원이 행여라도 이 사태를 발견하고 와 더 큰 사태를 만드는 사고가 일어날까 두려워 고개를 돌리고 어쩐지 아빠한테 연애를 들킨 미성년자 같은 마음이 드는 바람에 고개를 푸욱 숙였더랬다.
근데, 이게 뭐 내가 잘못한건가. 싶은 마음이 스물스물 올라올 때 쯤.

 

"동우야. 니가 잘못했다는게 아니라, 형은 이게 방식이 잘못됐다고 보거든."
"방식이..?"
"그러니까. 니가 키스를 하든 섹스를 하든 좋다 이거야. 물론 좋진 않아, 씨발. 어떻게 키워 놨는데. 근데 아무튼 성인이니까. 뭐 좋은 사람이랑 쿵짝맞는거 좋다 치자. 좋은 일인데. 그건 사귄 다음에 해야지. 아니 적어도 그런걸 했으면 사귀자라는 표현이 있는게 맞지. 너 호원이한테 사귀자 했냐?"
"안했지요.."
"호원이는?"
"호원이도, 뭐."

안했지.


"그래도, 좋다고는 했는데. 내가."
"호원이는?"

음. 안했지.


"그러니까, 남우현한테 말해봤자 아무 의미없으니 이호원한테 직접 가서 물어봐. 좋아하냐고 너. 감당할 수 있겠냐고."
"그런걸 어떻게 물어봐요..윽."
"딥키스 씩이나 한 위인께서 이제와 뭐가 부끄러운건데."


부끄러운게 아니라 사실은.
무서운거라고. 우현의 말마따나 육체를 홀라당 가져다 바친 것도 아니고 술김에 한 키스가 다였다지만 그래도 괜히 확인하려고 했다가 아니라고 하면. 그냥 실수였다고 하면. 진지하게 생각하는 줄은 몰랐다며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버리면. 그건 너무 슬프잖아.
차라리 상상속에서라도 호원과 만나고 있는 저의 모습이 행복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하지만 역시 그건 안되겠지. 왜냐면..


"일주일 내로 확답 안 가지고 오면 너 내가 머리 밀어서 집에 가둬버릴줄 알아."


머리 밀리는건 싫으니까.

취하지도 않은 청춘이 비틀거렸다. 내가 이렇게 비틀리는 동안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점점이 멀어지는 호원의 동그란 뒷통수를 보며 다시 한숨이. 카톡, 하며 울리는 핸드폰 액정을 보자 잠시 자리에 멈춰서 있는 호원의 이름이 둥둥 떠다닌다.

이따 집으로 와. 간결한 말에 한숨을 쉬며 뭐라 답장을 할까 고민 하는 새로 여전히 길 한가운데에 멈춰 끈덕지게 핸드폰을 보는 모습이 조금 의아해 고개를 갸웃. 알았어, 하며 이모티콘 까지 찍어 보내자 그제야 핸드폰에서 멀어지는 새까만 머리통, 다시 내딛는 발걸음 같은 것들이 이상할 정도로 시야를 가득 매워온다.

호원의 빨라진 발걸음에 이제 더는 그 동그랗고 까만 선이 보이질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참을 호원이 떠나간 동선을 보다, 그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내가 네게 보였던 무수히 많은 모습 중 너를 가장 괴롭힌 내 모습은 뭐였을까.
좋아하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는건 가끔은 참 괴로워.

 

 

 

 

 


-----------------------------------------------------------------------------------------

 

 
 

 


청 춘 지 옥

 

뭐해, 안 들어오고.

호원의 부모님이 지방으로 다시 내려간 탓에 빈 집엔 호원 뿐이었다. 모르던 사실도 아닌데 오늘따라 긴장되는건 아마도, 성규로부터 받아온 미션이 있기 때문에. 또 잘생긴 얼굴에 홀라당 넘어가 확답이고 나발이고 들러붙어 버릴까봐 걱정되어서.
꾸물거리는 저의 팔목을 잡아 안으로 들이는 얼굴은 오늘도 너무 열심히 일하고 있구요.

안돼, 안돼. 정신차리자 장동우. 고개를 흔들거리고 비장한 모습으로 호원의 손을 뿌리치며 안으로 들어서 쇼파에 앉는 것까진 좋았다. 본격적으로 말을 내뱉으려 입을 벌리자 마자 풀썩 하고 저의 옆자리에 앉아 허리를 감고는 밥은. 하며 묻는 낮은 목소리에 일차 위기. 먹, 먹었는데. 하는 대답에 잘했네. 하며 마주쳐 오는 눈에 이차 위기.

"그만 보고 눈 감아."
 
넉다운 이라지요.

 

 

 

 


청춘지옥 04.청춘 익스프레스

 

 

 

 


뭔가에 홀린듯 눈을 감자 이제는 술기운이 아니라, 정말이지 더는 멀쩡할 수 없는 정신일 초저녁에 닿아오는 입술이 뜨거웠다.
이호원, 너 진짜 사람 홀리는거 장난 아니다. 동우는 호원의 감긴 속눈썹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깨물린 입술 새로 들어오는 혀도 뜨겁고 허리깨를 부여 잡은 손도 뜨겁다. 정말 이러다 다 타버리겠어. 지금 혈압재면 아마 나 수술하라고 할 수도 있어. 그런 생각들을 하기가 무섭게 좀 더 깊게 혀 끝이 맞닿는다.

자, 잠깐. 정신 차려야해. 한참이 지나서야 그런 생각이 든 동우는 가까스로 이젠 거의 쇼파에 눕듯이 해 저를 안고 있는 호원을 밀어냈고 별로 아쉬울 것 없다는 듯 떨어져나가는 몸을 보며 잠깐 울컥. 자꾸만 귓가로 몸만 홀라당 바치고..몸만 홀라당...하는 우현의 목소리가 울려오는 것이다.


"표정이 왜 그래?"
"내 표정이 왜?"
"엄청 비장한데. 독립투사 같아."
"그치. 독립할거거든."
"무슨 독립?"
"너한테."


휘둘리지 않겠다 이거야. 라고 호기롭게 말은 내뱉었지만 상한 생선을 보듯 대체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건가 싶은 표정으로 저를 보는 호원을 보며 대체 이걸 어디서 부터 어떻게 풀어내야 좋을까 생각해봐도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좀처럼 말이 나오질 않는다.

몸만 홀라당 갖고 백일은 대체 그래서 언제냐고! 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고. 키스한 날부터 사귀는거야, 오늘이야? 라고 하는 건 더 이상하고. 참, 이 나이에 날짜 따지며 사귄다 만다 하기도 더더 이상한 것 같고. 사실 제일 하고 싶은 말은 넌 언제 키스 해봤다고 키스를 이렇게 잘해!였다는 것은 한 참 후에야 인정.


"누구한테 또 무슨 소릴 듣고 왔길래 이래."
"누구한테, 들었다기 보단."


물론 그게 크긴 컸지만.


"동우어 공부했잖아, 나. 내뱉어봐. 해석해보게."
"왜, 키스해?"
"질문이야?"
"왜, 지금.."
"하고 싶으니까."

화륵. 저게 원래 저렇게 단도직입적인 애였나. 그래, 그런 애였지. 하지만 그건 내가 원한 답은 아니야. 떨리는 답은 맞지만 원하던 답은 아니라고. 작게 한숨을 쉬자 이젠 여유로이 웃는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휘둘리지 않겠다 뱉은게 일분도 채 안 된것 같은데 저 웃음 하나에 또 마음이 갈대처럼 휘어진다.


"나는...너를 잘 모르겠어. 호원아."


나를 좋아해? 그래서 키스도 하고 싶은거야? 그게 아니면 왜 나한테 잘해줘? 왜, 잘해줬어? 밥은 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어디 아픈데는 없는지 그런게 너도 궁금해? 아무것도 아닌 일상인데도 알고 싶어?
그게 아니면 너, 나한테 이러면 안되는 거잖아. 나는 너 좋아하니까 내게 닿는 네가 좋아. 뭘해도 좋고 무슨 말을 들어도 좋아.
이제야 하고 싶은 말들이 머릿속에 정리되어 떠올랐지만 정작 입밖으로 나온 말은 몇 가지 없었다.


"내가 너, 좋아해서. 너는 너무 착하니까 그냥 받아주는거야..?"
"좋아한다고 다 받아줬으면 기사 났어, 나. 21세기 의자왕으로."
"그럼, 뭐야..?"

그럼 뭐냐니. 그 말은 자존심이 좀.. 상하는데.


"또 우현이형한테 홀라당 넘어갔지, 너."
"아니거든!"
"우리 일인데 왜 장동우는 그런 순간엔 다른데로 먼저 달려갈까."


일어나. 밥 먹고 집에 데려다 줄게.

호원의 피로해 보이는 얼굴에 동우는 그래. 하고 체할 것 같은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혼자서.
혼자 갈 수 있어, 하는 말에 그럼 혼자 가. 하는 말이 괜히 서러워져 눈물이 핑 고인 채로.

 

 

 

 

***

 

 

 

머리 밀릴 준비 됐냐?

동방에 들어서자 마자 서슬퍼런 성규의 눈빛이 닿아오는 것에 움찔. 아 오늘은 머리 밀릴 기분 아닌데. 컨디션도 안좋고.
아닌게 아니라 늘 건강했던 저 답지 않게 어제 밥을 불편하게 먹은 탓인지 내내 속이 안좋아 끼니를 걸렀더니 하늘이 노랗게 보일 판이다. 거울에 보이는 제 얼굴은 평소와 같은 혈색이 아닌게 성규도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다가와 이마에 손을 얹어본다.


"열 나는데? 안색은 왜 이래?"
"체했나봐. 으..나 힘 없어요. 두시간 이따 수업인데 그 때 깨워줘."
"병원 안가도 돼?"
"몰라, 몰라. 잘래."


집에 가서도 연락이 없는 것에 풀이 죽어 그 좋아하는 잠도 못자고 뒤척인 탓인지 몸이 늘어진다. 핑핑 돌아. 누가 내가 누운 쇼파를 돌리는 것 같아. 그런 느낌 속에 잠이 들었다.
아잌아잌, 소리가 들리는게 성열이 왔나 싶은데 지금은 상대하기 상당히 힘든 상황이니 깬 거 티내지 말아야겠다. 으, 이호원 밉다.


"야, 동우 아파서 자. 조용히 말 해."
"에엑? 이 형이 웬일로 다 아파?"
"얼굴 허얘가지고. 병원 가야 될 것 같은데."
"아아! 그래서 호원이 새끼가 동우형 과제 대신 냈구나."


이호원 밉다.


"지 수업은 내가 대타 뛰게 해놓고 왜 2학년 전공을 듣나 했어."


이호원 진짜 밉다.


"그래서 호원인 지금 어디 갔는데?"
"도서관에 책 빌리러. 걔 오후 수업 없어서 피방이나 갈라 했더니, 에이."
"이호원이 수업도 끝났는데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갔다고?"
"뭐래더라? 경제학 뭐였는데.."


경제학 뭐..라 하면, 자신이 시간표를 짤 때 호원이 자긴 교양까지 전공 냄새 나는 건 죽어도 듣기 싫다며 학점 받기가 하늘의 별을 따다 달이랑 바꿔가면 에이. 라는 전설의 그 과목이고 동시에 곧 있으면 자신이 들어야 할 수업 이름 앞 글자 인 것 같은데.


"어, 이호원 카톡 왔다."
"일일히 중계하지마라.. 애 깬다니까?"
"잉..? 병원 보내라는데?"
"뭔 소리야."
"어차피 동우형 잠들면 못 일어난다고 잠들었을 때 병원 데려가래. 자긴 수업 들어야 된다고."
"수업 없다며?"
"나 모르는 수업이 생겼나. 아닌데, 이호원 나랑 시간표 거의 같은데. 이상하네."


이호원 너무너무 미운데.
보고싶다.

 

 


.
.

.

 

.

 

급체래. 어. 아니, 괜찮대. 어어. 링겔 맞고 있어. 야 근데 이 형 진짜 안 깸. 아니, 내가 업었지. 어. 아잌 뭔 개소리야, 미친놈아. 근데 언제 오게? 나 좀 이따 가야 되는데. 명수 수업 끝날 때 됐는데 오라고 할까? 아.. 얼마나 걸려? 어. 오키오키.


몽롱한 정신으로 부산스레 하지만 나름 조용히 움직이는 듯한 성열의 기다란 몸 짓을 본다. 흠칫, 하더니만 뒤돌아서 저를 응시하는 눈은 마치 사슴 같아서.


"나 형 엉덩이 안 만졌다!"


말은 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쟤는 입을 열면 안돼.


"형 근데 또 살빠졌어?"
"몰라, 쫌 빠졌나."
"뭐 고민 있어? 이 열이에게 열의를 다해 물어봐."
"열의의 뜻이 뭔진 아냐..?"
"아잌!!! 이호원 지금 출발 했다니까 한 한시간 있음 올거야. 잠이나 자."


자자자. 하며 이불을 던지듯 머리 끝까지 씌우곤 털썩 주저 앉는 모양새. 이불속에서 프흐...하고 웃자 나 아직 안갔다. 하는 뾰루퉁한 목소리에 어쩐지 좀 더 편해지는 마음. 등만 대면 자는 체질인데 심지어 등대고 누워있으니 아까보다는 좀 더 편하게 잠이 오는게 신기해 눈을 느리게 깜빡깜빡.

우현이 형은 형보고 쪼다라고 하지만 내가 봤을 땐 나 빼고 다 쪼다야.


"앓지만 말고 풀어라, 쫌. 바보같이 맨날 이래. 모르는 척 하는건지 모르는 건지.."


열의 씨발, 열의가 뭐가 중요해.

"자..? 동우형 자냐..?"

그래, 차라리 자라. 새나라의 어린이는 꿈을 먹고 무럭 무럭 자라. 키는 글러도 생각은 좀 클지 누가 알아,

"아직 안자거든..."
"아 이호원 이 새끼는 좀 빠릿빠릿 못 움직이나."


참나. 하고 동우는 그냥 한 번 웃고 만다. 좀 과격하지만 꼼꼼하게 덮여지는 이불에 놀랄 정도로 잠이 쏟아졌다.

꿈을 꾸었다. 꿈속엔 호원이 있었고, 자신이 있었고, 미애가 있었다. 젠장.
그래서 호원이와 미애는 행복하게 오래 오래 살았답니다. 와 같은 결말을 볼 것 같아 억지로 억지로 의식을 깨워보는데 이마에 닿는 차가운 손가락에 정신이 좀 더 번쩍.


"눈을 못 떼게 해, 왜 자꾸."


한숨처럼 흩어지는 말에 움찔.


"일어나, 집에 가서 자자."
"나, 혼자 갈 수 있는데."
"알아."


그래도 같이가. 형 멍청한거 나 잠깐 잊고 있었어.


"호원아."
"그냥 다.. 나한테 말해. 형이 지금 무슨 생각 하는지, 뭐가 불만이고 무슨 말이 듣고 싶은지. 남이 아니라 나한테 먼저 말하라고."


집에 혼자 가기 싫으면 싫다고. 데려다 준다고 하면 그냥 좋으면 좋다고 하면 되잖아, 근데 싫다고 가놓고 넌 연락 한 번도 없었지. 그런 주제에 얼굴은 그 모양해서 넋놓고 다니고.


삽시간에 귀로 들어오는 말들이 따가운데 따뜻하다.
짙은 속눈썹 사이에 자리한 정갈하고 까만 눈동자가 올곧게 저를 바라 보고 있었다. 저만, 눈에 담고 있었다. 성열의 말대로 자신이 정말 바보인 것 같아.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로 모르고 있었다.

나는.. 이호원을 정말로 좋아해. 그냥 착각이나 잠시면 지나갈 감정, 호기심 그런 것들이 아니라, 나는.
이호원을 진심으로 좋아해. 그렇지 않고서야 호원의 눈에 오롯이 담긴 저의 모습이 이렇게까지 기쁠 수는 없는 일이다.
좋아하는 사람의 눈에 내가 담기는 기분. 저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이제 모르겠어, 이젠 진짜 제 마음 둘 곳을 모르겠다. 재고 따지고 그런거 나 진짜 소질 없는거 같아. 그냥 하고 싶은 말 하고 살래.


"죽어도 먼저 연락 안하지."
"이호원 너 좀 조용히 하고."


나 좀 좋아해줘.


"나 좀, 좋아해주라."
"장동우 진짜 바보네."


충분히 그러고 있어.


"좋아해."


…너는, 내 마음 상상도 못해.

짙은 입술이 내려 앉았다. 똑똑, 하며 내려가는 약 처럼 조용히 네가 내게 스며 든다.

자꾸 확인하고 싶어 해서 미안하다 말하며 청춘의 조각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너와 내가 전부 맞물리게 되면 우리의 청춘도 끝나는 거냐 물으며.
그 때 너는 내게 대답한다.

끝나 있을 그 시점에 서있겠다고. 그리고 다시 시작하겠다고. 지나간 청춘을 붙들며 사랑하지 않겠다고. 불같기만 했던 젊은 날에 사랑은 마치 지옥 같아, 그 짧고도 긴 통렬한 시간을 보내고 나면….
오늘을 돌아보는 내일이 되어 기다리겠다고.


"좋아해."


한껏 터지는 웃음, 울 때면 잔뜩 찡그려지는 눈가, 어린애 같은 습관까지도.


"좋아한다."


언제나, 너보다 많이.

 

 

 

 

 

----------------------------------------------------

 

 


청 춘 지 옥


머리는 결국 밀렸었다. 자신도, 호원도 빡빡.
2년.  시간은 왜 이리도 안 가던지. 제대 후 복학한 학교는 다르지만 여전했다. 인사를 하는 사람이 좀 늘었다는 것과, 인사를 했던 사람이 또 그만큼 줄었다는 것 말고는.
이제야 겨우 민간인 만큼 자라난 머리를 만지작 거리며 새내기들이 우글거리는 개강파티 장소로 발을 딛자 새까맣고 반짝이는 눈들이 마치 고대 유물을 보듯 저를 보는 것에 쭈뼛. 아는 얼굴을 찾아 두리번 두리번 하니 반갑다 못해 욕나오는 얼굴.

"야이 개새끼야!!!!!!!!!!!!!!!!"
"그래 내새끼."

때리려는 저의 주먹을 맞잡다 이내 맞아 주곤 웃어 주는 얼굴이 예전과 꼭 같아 동우는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도 모른채 서서 울었다. 엉엉. 그리고 그런 저를 달래다 같이 우는 친구를 보며 더 울었다.
장뿌엥, 남울보. 그런 별명이 졸업할 때 까지 끈질기게 붙어 다니게 된 역사적인 날이었다.

 

 

 

 

청춘지옥 +1. 보이지 않는 청춘

 

 

 

 


그렇게 잠수타고, 나 진짜 너 죽이고 싶었다. 남군.


"사정이 좀 있었다, 엉아가."
"니가 왜 내 엉아야!"
"동우야."
"왜."
"나 할머니 돌아가셨다."


잔을 한잔 쭉 들이키며 우현의 눈이 감겼다. 동우가 군대에 가고 정확히 일년 후 부터 우현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사방으로 소문해봐도 휴학했다는것 같다는 추측의 말 뿐 성규조차 우현의 종적을 알 수 없던 것이다.
바쁘신 부모님 탓에 할머니 손에 키워져온 우현에게 할머니란 부모 이상의 존재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던 터라 동우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채 그저 비어 있는 우현의 잔에 소주를 꼴꼴 따르고 저의 잔에도 한 잔 꼴꼴 따른 후 숨을 깊게 내쉴 뿐이었다.


"무슨 말 해야 할지 모르겠지?"
"뭐.."
"내가 그랬어."

그래서, 그랬어.


나 여기서 울면 진짜 병신 쪼다야. 얼마나 힘들었을까, 저 어린게. 까불까불 거리며 다녀도 속 깊은 제 친구의 속내를 모를리가 없는 동우는 그저 어깨를 톡톡 치며 기일 언제야. 하며 물을 뿐이었다.
그래도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을 못 할 정도면 저 말 좋아하는 애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자꾸만 비집고 나오려는 눈물을 꾹꾹 누르며 다시 소주 잔에 소주를 가득.

점점 흐려지는 시야로 성규의 잘빠진 옷태가 보이고, 옷 태 뿐 아니라 실제하는 성규라는 걸 자각한 후 동우는 장렬히 전사했다. 끼익끼익 전사한 저의 머리통을 가져가는건 냄새로 보아하건데 아마, 아니 아마가 아니라 정확히 호원이려니.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 속에서 근간에 느끼지 못했던 편안함을 느끼며 느리게 눈을 깜빡깜빡.

"이열, 이호원 잘 생겨졌다?"
"형보단 늘 잘생겼었지."
"명수 그 새끼는 제대 언제해? 이 꼴 안보려면 명수가 있어야 하는데..."
"한 육개월 남았나. 그나저나 남우현, 너 건방짐이 진짜 하늘을 찌른다. 연애에 정신 팔린 동우는 그렇다 쳐도 나한텐 연락 했어야지."


전사한 와중에도 제 욕하는 건 들리는지 안 팔렸거드은...주절거리는 입에 안주를 하나 넣어 주곤 닫아주기.


"뭐.. 나 신경 쓸 일이 있었나, 형이. 동우 군대가고 형 공부만 했잖아. 빨리 취업한다고. 오늘 볼 줄은 몰랐네."
"여기 오려고 일주일간 야근했다. 너 졸업생이 이런 자리 오는게 쉬운거 같지? 일단 존나 쪽팔려. 두번째로는 또 존나 쪽팔려. 그리고 세번째로는 존나.."
"쪽팔린다고?"

반갑다고. 오길 잘했네, 쪽팔림을 무릅쓰고.

"하긴, 형도 동우 제대하고 처음 보지. 워싱턴에 인턴 갔다 온지 얼마 안됐다며."
"넌 내가 얘 못봐서 안달난 귀신 붙은거 같냐?"
"아니면 눈 좀 떼시든가요. 어미새도 아니고. 형이 암만 그래봤자 이새끼 이호원한테 홀라당 맛가서 말 듣지도 않아."

듣거드은...

"야 쫌 자라!"

하며 결국 머리통을 콩콩. 아퍼, 씨..하며 한박자 느리게 이마를 문지르자 웃는 호원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건 지 애인이 맞아도 좋다고 웃는다. 티비 보면 막 왜 건드리냐며 화내고 그러던데. 술이 취하긴 했는지 말도 안되는 억지로 심통이 나려는 찰나 가만가만 이마를 만져오는 약간은 체온 낮은 손가락에 웃음이 번지고 와중에 답지 않게 흥분해 열변을 토하는 성규의 목소리는 여전히 따뜻하다.

"‥존나..일을...존나...진짜 존나...! 시켜.  근데 웃긴건 뭔지 알아? 다음날 되면 일이 또 생.."

야, 이호원. 고만 좀 만지실게요.. 애 자는데 뭘 자꾸 만져싸 새꺄!

"깨있을 때 만지면 자꾸 덤벼서, 요즘."

포지션에 대한 이해도가 좀 떨어진달까.

"니네도 징글징글 하다. 벌써 사년 다 되지 않았냐?"
"내가 보기엔 형들이 더 징그러운데."

둘은 참 변하지도 않아. 하는 말에 어깨를 으쓱. 변하고 말고 할게 있나. 멍하니 중얼거리는 우현의 잔에 술을 따라 주고 또 얼마간 우현의 소식을 듣고 한시간쯤 지나고 나니 오래간 못 봤다는게 믿겨지지 않을 만큼 분위기가 또 무르익어 버려서.
그나저나 장동우 술 먹고 뻗는 버릇 좀 고쳤으면 싶은데.

"성규형, 형이 동우형 안게 언제랬지?"
"얘 코찔찔이 시절 부터니까. 한... 이십년 좀 안됐나."
"술도 형이 가르쳤지?"
"내가 가르쳤으면 이러고 뻗어 있겠냐, 버르장머리 없이. 이거 술마실 때마다 주워다 집에 넣어 주느라 고생한거 생각하면.."
"고생은 내가 했지."
"내 인생은 너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
"고작 이런걸로?"
"야, 나무야."

고작이라니. 새터에서 동우 죽은거 아니냐고 뺨날리던 널 봤을 때 난 진짜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었다니까. 아..내가 이제 이 짓을 더 안해도 되겠구나, 랄까.

"뺨을 날렸다고?"
"과거에 화내는건 그만 할때도 되지 않았냐, 호원아..?"
"화는 무슨.. 근데 우현이 형은 군대 언제 가게?"
"아...나 면제야. 어깨 나가서, 재검 받았는데 안된다더라. 딱히 불편한 건 없는데."
"어깨는 왜??"
"알바하다가. 하루가 너무 안가더라고. 아무리 자고 일어나도..변하는게 아무것도 없더라고. 그래서 몸이나 축내자 싶어 물류 뛰었는데 나도 내 어깨가 그렇게 쉽게 나갈 줄은 몰랐어."

아, 이건 동우한테는 말하지 마라. 이 새끼 또 운다. 안 그래도 못 생긴게 울면 더 못 생겨서 볼 수가 없어.

"기일이 그래서 언젠데?"
"뭐."

오늘.

"그렇게 됐네."

하는, 답지 않게 차분한 목소리가 흐르고 잠시간 정적. 담배 있냐? 성규의 말에 나이스타이밍. 한 대 피고 오자. 하며 언제 무거운 말을 던졌냐는 듯 가볍게 일어서는 우현의 뒷모습을 보다 호원은 할 수 있는 한 성의를 담아 동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참 딴남자 때문에 잘도 울어, 장동우는."
"쟤가 남자냐.."
"여자는 아니지."


뚝뚝 눈물을 떨구면서도 어이가 없는지 픽, 하고 웃다가 또 뚝뚝.

우현이가 너무 불쌍해.
바쁜 우현의 부모님은 좀 더 솔직히 말을 하자면, 바쁘지 않았더라도 우현을 신경쓰지 않았을 분들이었다. 바쁘다는건 핑계고 그냥 애정이 없는 사이에 사업을 위해 만나 또 다른 사업을 위한 자식을 낳고 그 결과물이 우현이었을 뿐. 사랑 받고자 애를 썼던 어린 아이는 커서도 밝고, 애정표현을 잘하고 또 그런 주제에 매번 쓸쓸한 남자로 성장했다.

나만 행복한 것 같아서 미안해, 미안하다. 그런 못된 생각이 자꾸 머리를 맴돌았다. 놀리는 것도 아니고 나만 행복해 미안하다니 그런 말이 어딨담. 하면서도 미안한건 미안한거였다.
호원을 만나 멍청하게 앓던 짝사랑도 맞사랑이 되고 힘들긴 했지만 나름 여러 전우를 남긴 군대도 다녀오고 취업은 이제 슬슬 생각해보자, 하면서 찡찡 거리기 바쁘던 자신과는 달리 여전히 세상을 상대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친구를 보며 동우는 좀 더 어른이 되어야 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흐릿해진 시야로 걸어 들어오는 성규가 보여 동우는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얼른 닦아 내었다. 평소엔 질색하던 담배내음이 오늘은 싫지가 않아서, 꼼꼼히 손을 씻고 들어오는 우현에게 괜히 시비를 건다. 어휴, 날 잡아서 너 뱃속 들어갈거야. 폐 닦으러. 하자 평소처럼 웃어주는 얼굴이 또 정겹고 슬프다.

우현아. …왜 네 청춘은 그렇게 아파.

 

 

 


***

 

 

 

"남군, 빨리 결혼하면 좋겠어."

 

휙. 하고 새까만 머리통 두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뭐야, 갑자기. 어이없다는 듯 저의 어깨를 잡는 우현을 쳐다보며 다짐하듯 한 번 더 말한다.

"그렇잖아, 난 니가 빨리 결혼하면 좋겠어. 나야 이제 결혼은 글른 몸이다만..."

하며 늘어지는 말꼬리를 얼른 다잡고 어쨌든 남군 결혼 소취요. 내뱉는 입술을 툭툭. 성규가 아프지 않게 때려준다.

"결혼이 뭐 니가 말한다고 되냐. 나이가 몇인데."
"아니, 나이가 뭐가 중요해요. 형네 회사에 참한 아가씨 없어? 우리 우현이가 어디 꿇리진 않잖아. 이만치 생겼지, 이만큼 몸좋지, 웃는거 예쁘지, 착하지, 상남자 매력도 있지. 돈도 많고. 이 정도면 어휴...나같으면 아주 감사합니다, 하겠다."
"그 말 그대로 호원이한테 전해줘도 되지?"
"아니, 아니. 절대 안돼요."


호원은 의외로 질투가 많았다. 보이지 않는다 뿐이지 눈에는 늘 불길이 치솟아 있는 타입이었다. 으..뒷감당 어떻게 하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친해진 주제에 아직도 가끔은 성규랑 호원은 티격태격한다. 내가 모르는 시간을 성규형만 아는게 싫어. 그게 주된 이유였다. 성규는 그러면 동우가 중학생 때는, 동우가 초등학생 때는, 동우가 유치원 다닐 때는.. 하며 자신조차 기억나지 않는 유년시절까지 주절주절.

그러고 말면 다행인데 종내에는 그 불똥이 저에게 튀는게 문제였다. 성규형이 그렇게 좋으면 거기 붙어 살지 왜 나한테 왔어. 한 번은 그렇게 내뱉어진 말에 욱해 규형이 나를 안 받아줘서 너한테 갔다! 라고 했던 날이 우현의 표현에 따르면 호원에게 '몸을 홀라당 가져다 바친' 첫 날이 되었던 것이다.
 
여하튼,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남우현 이게 왜 아직까지 제대로된 연애 하는 꼴을 못볼까 하는 의구심이 갑자기 생겼더랬다.
애정결핍이 있는 사람들은 보통 가볍고 짙은 연애를 반복한다던데. 나몰래 호박씨 깐게 아니라면 아닌게 아니라 우현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연애를 한 적이 없다. 왜이지. 왜일까....하다.


"이건 다 형님 때문인 것 같아요."
"....? 갑자기 난 왜?"
"형이랑 있으면 연애를 못해. 나 봐, 고딩 내내 형 감시하에 있다가 딱! 벗어나니까 연애 하잖아. 우현이도 그런거 아닐까요?"
"니 말은, 내가 널 감시했다는..뭐 그런..?"
"통금 있었잖아!!"

우리 엄마 아빠도 안 건 통금을! 형이! 걸었잖아요!
그 부분에 있어서는 성규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워낙 이리 튀고 저리 튀기 좋아하는 동우의 성격을 아는 이상 통금이라도 안 걸어 두면 어디 나가 술 퍼먹고 뻗어서 안들어올 수도 있고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저 멍청이 내가 안챙기면 누가 챙기나 싶어 그 와중에 제가 어떻게 키워왔는데(물론 호랭이 새끼한테 이렇게 잡혀갈 줄 알았다면 그냥 뒀어도 됐겠다는 후회도 했지만) 그 꼴을 본단 말인가.
동우는 원래 손이 많이 가고 사람 신경 쓰이게 하는덴 도가 튼 위인이라서 차라리 제 몸이 피곤하고 말지 동우를 신경쓰다 몸과 마음이 피폐해질 바에야 간섭을 하자, 그렇게 된 것이었다.


"우현이한텐 통금 건 적 없는데."
"왜 차별해!"
"이게..왜 그렇게 해석되는진... 모르겠는데. 우현이는 뭐 믿을만 하니까."
"난 못믿어서요?!"
"응."


술취해 정신 못차리고 딥키스한 너를 믿는게 더 이상하지 않냐?


"형아..그게 대체 몇 년전 일이에요...?"
"그러니까 결혼이니 나발이니 헛소리 그만 하고 너는 니 앞가림이나 잘하실게요. 토스 뭐 나왔어?"
"그럼 형이라도 결혼 하든가!"
"안 해."
"대체 왜??"
"너 같은 아들 낳을까봐."


언젠 내 딸이랑 결혼 시킨다더니만. 변덕쟁이셔 아주.


"니가 내 며느리 못 낳아 주잖아. 야, 따지고 보면 다 네 탓 이네."
"하, 참. 그게 왜....내 탓...아.."


그런가.

단순한 사내의 머리가 또 복잡해진다.
그래, 어쩌면 이건 다 내 탓이야. 내가 성규형 며느리를 낳아줄 수 있었으면 성규형이 결혼을 했을 테고 그럼 우현이를 감시 하지 않았을 테니까 우현이도 결혼할 수 있었을텐데.
 

"미안해, 남군.."
"너... 못 본새에 더 바보가 된 거 같아. 이호원 이 새끼가 애를 퇴화 시켰나.."

어릴 땐 어리니까 귀여운 맛이라도 있었지, 이건 뭐 아주..

"다 내 탓이야..."


내 탓..
하고 결국 뿌엥, 하고 터지는 울음에.


"아, 나 진짜..!"

너 대체 언제 어른되냐.

"괜찮아, 괜찮아. 연애고 결혼이고 내가 알아서 할게. 울지 좀 마라, 웬수야."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는 작은 손에 진정이 되어 갈 때 쯤 뭔가 뒷통수가 서늘한 느낌에 고개를 드니 무표정한 얼굴의 호원이 뚜둥.
왜 또 울..


"야 미리 말하는데 내가 울린거 아니다. 이 새끼 갑자기 나보고 결혼하라고 하더니 지 때문에 못한다고 혼자 이래. 너 나 없는 동안 애를 대체 어떻게 키운거야?"
"그러게. 너무 오냐오냐 했나봐. 동우형, 생각하는 의자 가서 앉아 있어."


눈썹이 빠직. 이호원 저거야 말로 내가 너무 오냐오냐 했지. 눈물을 쓱쓱 닦아내고 한 껏 노려보자 눈 또 붓겠네. 하며 눈가를 쓸어주는 손길에 또 마음이 녹아. 쟨 진짜 반칙이야. 왜 몇 년을 봐도 저런 모습에 홀리는 거냐고. 정말로 동우는 자신에게 생각하는 의자가 필요한 건 아닐지 생각했다. 눈이 데굴데굴.


"동우형, 우현이 형이 연애를 못하는 건 다 이유가 있어."

한가닥 한가닥 동우의 어깨에 걸쳐진 우현의 손가락을 걷어내며 호원이 동우의 옆자리로 들어온다.

"뭔데 그게..?"
"그건..."

야, 나 간다. 쓱쓱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성규를 보며 벌써? 하고 동우가 펄쩍 뛰다 시간을 보니 벌써까지는 아닌 시간.


"형아는 노예라 내일 출근이라는걸 해야 해요. 우리 동우, 형아 좋으면 형아 따라 갈까?"


하는 말에 호원이 동우의 팔목을 그러쥐고 대신 손을 짤짤 흔든다. 얼른 내 집에서 꺼져, 형. 얼굴은 아이같이 웃는데 나오는 말이 저런거다. 그럼 나도 가야겠다며 우현도 따라 일어서고 호원의 집(인지 동우 집인이 애매해진 집)에서 훤칠한 사내 둘은 페이드 아웃.


"그래서, 우현이가 왜 연애를 못하는건데??"
"형이랑 우현이 형이랑 친하지?"
"응!"
"왜 그럴까?"
"글..쎄...? 성격이 잘 맞아서..?"
"눈치가 더럽게 없거든."
"야!!"


난 몰라도 우현인 눈치 진짜 빨라. 걘 모르는게 없다니까.


"눈 뜬 장님이라고, 그 형도."


무슨 말인지 몰라 찡그려지는 미간을 펴주며 까만 눈동자가 마주쳐온다. 그리고, 경고할게 하나 있는데.


"또 뭐...하지 말란게 너무 많아, 너는."
"하면 안되는 짓을 너무 많이해, 장동우가."
"내가 뭘!"
"울지마. 너 우는거 보면 기분 이상해져. 근데 나만 그런거 아니래."


울리고 싶은 얼굴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모르니까 틈만 나면 쏟아내는 거겠지만. 더 뱉어내지 못한 말을 안으로 삼키며 호원은 멀뚱히 앉아있는 동우의 몸을 끌어다 키스했다.
오늘 제대로 한 번 울려봐. 하며.

한손에 감기는 팔목을 잡고 벌써부터 울 것 같은 눈을 바라본다. 이 눈엔 너무 많은게 담겨있어, 어린애처럼 화낼 때도 있는건. 그래도 나만 넣어 두었으면 하는 더 어린애 같아져 버린 마음에.

한층 색이 짙어진 청춘의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한 잔 할까 싶어 어쩐지 발걸음이 빨라진 것 같은 성규의 뒤를 졸졸 쫓아가며 몇 시 출근이랬지, 하자 여덟시. 하고 다가오는 짧은 대답에 괜히 따라나왔나. 싶은 우현이 훌쩍, 코를 한 번 들이켰다. 아 오늘 그냥 동우네서 뻐기다 올걸. 이호원이랑 그거 놀려먹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데.

생각하다 보니 저절로 한숨이 쏟아졌다.
‥장동우, 진짜. 울어야 할게 누군데 지가 울고 난리야. 양심도 없다, 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느라 한 잔 이야기를 꺼낼 타이밍을 놓치고 어느새 택시를 잡은 성규의 등을 향해 손을 흔들자 몸을 밀어 넣다 말고 다시 빼꼼히 나오는 머리.


야, 남우현.

"나, 너도 신경써."
"응?"
"나. 너도 신경 쓴다고."
"누가 뭐라고 했어?"
"그냥, 모르는 거 같아서."
"뭔 소리야."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며 우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 형이 대체 뭐라는 거야.

가로등 아래 다른 청춘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잡힐 듯 말 듯 아직은 잡히지 않는, 그 청춘이.